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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창동 감독 영화를 그동안 "좀 어렵고 무거운 영화"로 뭉뚱그려 생각했습니다. 버닝을 보고 나서도 뭔가 대단한 것 같은데 정확히 뭐가 대단한지 말로 못 하겠다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제가 틀렸습니다. 이 영화는 어렵게 만든 게 아니라, 일상의 아주 작은 장면 안에 모든 걸 꽉꽉 눌러 담은 영화였습니다.
신발끈 하나에 담긴 복선 구조의 밀도
일반적으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느슨하게 흘러가는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이 영화의 도입부 장면을 분석한 내용을 들여다봤을 때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받았습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장면, 아버지가 아들 철이의 풀린 신발끈을 직접 묶어주는 게 아니라 "묶어라"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3초짜리 장면인데, 이 장면이 후반부에서 조인성 씨가 맡은 상호가 아무 말 없이 철이의 신발끈을 직접 묶어주는 장면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관계의 본질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이처럼 이창동 영화의 특징은 '복선(伏線)', 즉 이후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서사 장치를 극적인 사건이나 클로즈업 없이 일상의 질감 안에 숨겨놓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복선이란 스토리 후반부의 의미가 전반부의 평범한 장면과 연결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서사 기법으로, 한 번 볼 때와 두 번 볼 때 영화의 무게가 전혀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는 첫 관람보다 두 번째 관람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문상을 가는 차 안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미옥이 "나는 옷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 한 마디가, 나중에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에서 예지가 50만 원이 넘는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미옥이 느끼는 감정과 곧장 연결됩니다. 게다가 남편 호석이 "문상 가는 마음이 중요하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참고 있는 사람은 호석 자신이라는 역설이 그 짧은 대화 속에 이미 깔려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부부 일상 대화로 읽었는데, 이 구조를 알고 나니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2025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것도(출처: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사이트) 단순히 '무거운 주제'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매 장면에서 단 하나의 컷도 낭비하지 않는 서사 밀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수상 소감으로 "질문"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도, 답을 가르쳐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 표현입니다.
- 신발끈 장면 → 아버지(호석)와 상호의 성격 차이를 동시에 예고하는 복선
- 차 안 '옷 논쟁' → 계급 감수성과 호석의 억압된 감정을 한 번에 암시
- "어디 좋은데 가시나봐요" 이웃의 인사 → 장례식 행렬이라는 아이러니를 도입부에 배치
- 참고 있는 사람이 "울고 싶으면 울어"라고 말하는 역설적 구조
플래시백이 '기억'이 아닌 이유 — 그리고 계급 욕망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플래시백 처리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flashback)이란 인물이 과거를 회상할 때 그 기억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면 그 장면이 펼쳐지는 방식이죠. 그런데 《가능한 사랑》은 이 공식을 비틀었습니다.
미옥이 예지에게 세차장에서 자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처음 꺼낼 때는 플래시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지가 "잠깐, 지금부터 카메라로 찍어도 돼요?"라며 카메라를 세팅한 뒤 미옥이 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순간부터 과거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 아름다운 플래시백 장면들은 미옥의 기억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예지의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남의 이야기를 서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예지의 창작욕(創作慾)이 그대로 시각화된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시점 구분을 의식하며 영화를 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예쁜 회상 장면이네"로 넘겼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인식하고 나면 영화 속 세 개의 플래시백 장면이 모두 빛과 연결된다는 사실도 달리 보입니다. 세차장에서 물줄기에 햇빛이 반짝이던 장면, 과수원 이슬에 아침 햇살이 부서지던 장면, 월미도에서 달빛을 바라보던 장면. 이 세 장면은 모두 가난과 외로움이 깔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들입니다. 창작자인 예지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편 이 영화의 뿌리가 된 사건 중 하나는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입니다(출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당시 노동자들이 공장 옥상에서 장기간 고공 농성을 벌이다 강제 진압을 당했고, 이후 수십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10여 년 전부터 이 사건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내가 이걸 찍어도 되는가"라는 창작자의 윤리적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민 자체가 영화 속 예지라는 인물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영화에는 십계명(十誡命)의 아홉 번째 계율인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가 첫 자막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십계명이란 구약성경에 담긴 열 가지 도덕 계율을 가리키며, 폴란드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슬롭스키가 이 계율 열 개를 각각 한 편씩 영화로 만든 작품이 〈데칼로그〉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 아홉 번째 계율을 재해석하는 기획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탐하는 것을 인물별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예지(조혜정): 남의 이야기 — 자기 삶이 소재로 충분하지 않다는 결핍에서 비롯된 창작욕
- 상호(조인성): 남의 육체 + 일탈 —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의 역설적인 금기 추구
- 미옥(전도현): 남의 자유 = 계급 — 상호의 별장과 전용 해변이 상징하는 경제적 자유
- 호석(설경구): 남의 생기 — 해고 이후 유령처럼 느끼는 자신과 달리 살아있는 타인의 삶
- 철이: 호루라기 + 술 + 콘칩 — 유일하게 탐한 것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 인물
자주 묻는 질문
Q. 가능한 사랑 제목의 의미가 뭔가요?
A.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물음표가 숨어 있는 제목으로 읽힙니다. 계급 차이가 있는 두 커플이 진짜 친밀해질 수 있는지, 타인의 고통을 창작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오랜 상처 뒤에도 부부 사이의 신뢰가 남아있는지를 동시에 묻는 제목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답을 담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제목은 오히려 질문 그 자체입니다.
Q. 베니스 심사위원 대상이 한국 영화 최초라고요?
A. 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심사위원 대상은 《가능한 사랑》이 한국 영화 최초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수상 소식이 나오면 "상 탄 영화"라는 선입견이 먼저 생기는데, 이 영화는 수상 이전에 봤던 분들도 "이건 수상이 필요 없는 영화"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독립적으로 완성된 작품입니다.
Q. 쌍용자동차 사건과 영화가 어떻게 연결되나요?
A.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영화의 출발점입니다. 호석이라는 인물의 트라우마, 동료에 대한 배신감, 케이크 가게에서 '산 자'를 미행하는 장면이 모두 이 사건에서 뻗어 나온 설정입니다. 다만 영화 자체는 노동 문제를 고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그 경험이 한 인간의 내면과 관계에 어떤 균열을 남기는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Q. 버닝 이후 8년 만의 신작인데 기다릴 만한가요?
A. 제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버닝도, 시도, 밀양도 모두 한 편도 빠짐없이 수준을 유지한 감독이 8년간 한 사건과 씨름하며 만든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기다린 만큼의 밀도가 영화 안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의 달무리 진 보름달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잔상으로 남는 영화입니다.
결론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에 저는 이창동 감독 영화를 "분위기로 보는 영화"쯤으로 뭉뚱그렸습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것이 이번 글을 쓰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입니다. 신발끈 하나, 차 안의 짧은 대화 하나도 허투루 쓰인 장면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극장에서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를 다 봤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추석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영화를 찾고 있다면, 《가능한 사랑》이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극장에서 본 뒤 넷플릭스 공개(11월 6일 예정)에 맞춰 다시 한 번 볼 계획입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 첫 번째엔 놓쳤던 복선들이 얼마나 더 보일지, 그게 지금 가장 궁금합니다.